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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학공(副提學公)최만리(崔萬理)선생의 묘소 및 신도비 입니다.

문화재명 : 안성시 묘 제32호
시대 : 조선시대 전기 및 1962
지정일자 : 1986. 5. 22
위치 : 원곡면 지문리 산3 불지촌(佛芝村)
규모 : 높이 178cm, 폭 61.5cm, 두께 33cm

::::: 상세설명 :::::

조선 전기의 문신 · 학자로 한성부(漢城府) 서부(西部) 반석방(盤石坊) 만리현(萬里峴)에서 살았다.
태종 14년(1414) 생원(生員)이 되고, 141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에 기용되었으며,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를 겸임하였다. 1427년 교리(校理)로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였으며, 1437년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이듬해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1439년 강원도 관찰사로 나아갔다가 이듬해 다시 부제학이 되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 1444년 6조목의 이유를 들어 이를 반대하기도 하였으며 환관(宦官)의 사모(紗帽) 착용이 옛제도에 어긋남을 지적하여 중국의 제도를 따르도록 하였다.
그는 곧은 성품으로 간언을 잘하여 당시 이름이 높았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신도비는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놓은 죽은이의 생애에 관한 사항들을 새긴 비로 무덤 남동쪽에 남쪽을 향하여 세운다.
최만리 선생은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의 문신․학자로서 자는 자명(子明), 호는 강호산인(江湖山人), 본관은 해주(海州), 하(荷)의 아들이다.
세종 원년(141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홍문관(弘文館)과 집현전박사(集賢殿博士)를 겸임했고, 세종 9년(1427) 교리(校理)로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한 뒤 집현전 직제학(直提學)․부제학(副提學)을 역임했다.
세종19년(1437)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부제학이 된 뒤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세종 26년(1444) 훈민정음(訓民正音) 반포(頒布)에 반대하여 한때 세종의 노여움을 샀고 환관(宦官)의 사모(紗帽) 착용과 척불(斥佛)․세자섭정(世子攝政) 반대 등의 상소를 올려 직간(直諫)으로 이름 높았다.
청렴결백한 태도로 일관,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백운산(白雲山) 기슭에 위치한 묘소는 부인 중화 양씨(中和楊氏)와 합장묘로서, 묘 앞의 구(舊) 묘비에는 「집현전부제학 최공만리지묘(崔公萬理之墓) 정부인(貞夫人) 중화양씨 부전(柎箋)」라고 새겨져 있다.
묘비 앞에는 상석․향로석, 그리고 좌우에는 문인석․망주석이 배치되었다. 묘비의 재료는 대리석이며, 규모는 높이 95cm, 폭37cm, 두께 18cm이다. 묘소 입구 우측에 위치한 신도비는 1962년에 건립된 것으로, 화강암 옥개와 장방형 비좌를 갖추었고, 비신은 대리석이다. 비문은 이숭녕(李崇寧)이 찬(撰)했는데, 비신은 높이 178cm, 폭 61.5cm, 두께 33cm의 규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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