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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공파 고죽 최경창선생의 시비(詩碑)입니다.

소재지 : 1) 전라남도 영암군 구림마을
2)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청석리

::::: 상세설명 :::::

고죽시비(孤竹詩碑)는 네모난 기단에 오석으로 세웠는데, 앞면에는 사랑하는 여인이 읊어 준 시조를 최경창이 운치있게 옮겨 놓은 한역가사인 <번방곡(飜方曲)=홍랑(洪娘)의 시조를 한역(漢譯)한 시>이 새겨져 있다.
折楊柳寄千里人(절양유기천리인)
爲我試向庭前種(위아시향정전종)
須知一夜生新葉(수지일야생신엽)
憔悴愁眉是妾身(초췌수미시첩신)

비 뒷면에는 <홍랑가비(洪娘歌碑)>라 하여 홍랑이 지은 시조가, 측면에는 1981년 문중의 협조로 고죽의 진적(眞蹟)을 세운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고죽 최경창(1539∼1583)
1539(중종 34)∼1583(선조 16). 조선 중기의 시인.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가운(嘉運), 호는 고죽(孤竹)이다.
최충(崔冲)의 18대손이며 자(滋)의 13대손이다. 수인(守仁)의 아들이다. 박순(朴淳)의 문하인이다.
최경창은 백광훈(白光勳)·이후백(李後白)과 함께 양응정(梁應鼎)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555년(명종 10) 17세 때에 을묘왜란으로 왜구를 만나자, 퉁소를 구슬피 불어 왜구들을 향수에 젖게 하여 물리쳤다는 일화가 있다. 1561년 23세 때부터 상상(上庠)에서 수학하였다.
1568년(선조 1)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예조·병조의 원외랑(員外郎)을 거쳐 1575년에 사간원정언에 올랐다.
1576년 영광군수로 좌천되었다. 이 때에 뜻밖의 외직 발령에 충격을 받고 사직하였다. 그 뒤에 가난에 시달렸다. 다음해에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으로 복직하였다.
최경창은 1582년 53세에 선조가 종성부사(鍾城府使)로 특수(特授)하였다. 그러나 북평사의 무고한 참소가 있었다. 그리고 대간에서 갑작스러운 승진을 문제삼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선조는 성균관직강으로 명을 고쳤다.
최경창은 상경 도중에 종성객관에서 객사하였다. 최경창은 학문과 문장에 능하여 이이(李珥)·송익필(宋翼弼)·최립(崔凌) 등과 무이동(武夷洞)에서 수창(酬唱 ; 시가를 서로 주고받으며 부름)하였다. 또한 정철(鄭澈)·서익(徐益) 등과 삼청동에서 교류하였다.
당시(唐詩)에 뛰어나 백광훈·이달(李達)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렸다. 그의 시는 청절하고 담백하다는 평을 얻었다. 문장에도 뛰어나 이이·송익필 등과 함께 8문장으로 일컬어졌다. 서화에도 뛰어났다.
숙종 때에 청백리에 녹선되고 강진(康津)의 서봉서원(瑞峯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 ≪고죽유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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