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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은 승지공파(承旨公派) 최경회 장군께서 전사한 유적지 입니다.

지정번호:사적 제118호
지정연도:1963년 1월 21일
소재지:경남 진주시 남성동·본성동
시대:고려시대(1079-1229년)
크기:면적 17만 3,036㎡

::::: 상세설명 :::::

진주성은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의 성지이다. 삼국시대에는 거열성(居列城), 통일신라시대에는 만흥산성(萬興山城), 고려시대에는 촉석성(矗石城), 조선시대 이래로는 진주성(晋州城) 또는 진양성(晋陽城)으로도 불리었다.
고려말 빈번한 해구(海寇)의 침범에 대비하여, 본시 토성이던 것을 우왕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석축하였다.
조선조 선조 24년(1591) 7월, 경상감사 김수(1537∼1615)는 왜변에 대비하여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을 쌓았다.
동 25년(1592) 10월에는 마침내 왜적(倭賊)의 침략으로, 제 1차 진주성전투가 있었고, 이에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1554∼1592)은 불과 3,800명의 군사로서, 2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晉州城大捷)을 이룩하였다.
동 26년(1593) 6월에는 전년의 패배를 설욕코자 10만 여명이 또 침략하여, 제2차 진주성전투가 있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였다.
최경회(崔慶會)장군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병영으로 남진하던 중 진주성을 사수하게 되었는데 중과부적으로 성이 떨어지게 되어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1593년 6월 왜군의 재침시에는 군관민 6만이 최후까지 항쟁, 장렬한 최후를 마쳤으며, 이때 논개()는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하였다.
동 37년(1604)에는 우병사 이수일(李守一:1554∼1632)이 합포(合浦:馬山)의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겨와서 이래로 경상도 우병영이 있었고, 광해군 10년(1618)에는 병사 남이흥(南以興)이 촉석루·북장대·서장대·동장대 등을 중건하였다.
고종32년(1895)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 건양 원년(1896) 8월부터는 경상남도관찰사 감영이 있었고, 1925년까지는 경상남도 도청이 있었다.
1969년부터는 제1차 진주성 복원사업을 추진하여, 1972년에는 촉석문을 준공하였고, 1975년에는 성곽보수를 완료하였다. 1979년에는 제2차 사업으로, 민가 751동의 철거를 추진하여, 1984년에 마무리하였고, 1992년부터는 제3차 사업으로 성 외곽을 정비하였다. 성내에는 국립진주박물관·진주성임진대첩 계사 순의단·창렬사·호국사 등이 있다.
최경회(崔慶會)장군

중종 27년(1532)에 나서 선조 26년(1593) 진주성에서 전사한 조선조의 문신이며 무관으로 자는 선우 호는 삼계 혹은 일휴당이라 했으며 해주 최씨 천부의 아들이다.
명종 16년(1561) 진사에 급제하였고 선조가 즉위하던 해(1567)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장수현감을 거쳐 영해부사가 되었다. 그는 어버이의 상을 입고 여막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터졌다.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켜 출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복을 벗어던지고 장수에서 의병을 불러 일으켜 금산 무주의 적상산성, 창원, 성주 등지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러 전공을 세웠다.
그 공이 인정되어 이듬해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병영으로 남진하던 중 진주성을 사수하게 되었는데 중과부적으로 성이 떨어지게 되어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진주 창렬사에 모셔졌고 시호는 충의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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