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보검색   ◎ 검색요령 : 족보에 등재된 이름(諱)만을 입력합니다. (성은 입력하지 않습니다.)
아이디 기억하기

족보는 언제부터 만들어 졌으며 어떠한 이유로 만들어 졌는지 그 역사(歷史)를 알아 봅니다.

족보의 역사

1,족보의 정의

조상의 얼과 역사가 보존된 사서(史書)로서 시조(始祖)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동일씨족(同一氏族)의 계통(系通)을 수록하여 사적(史積)과 선조의 행적을 기록한 책으로 성씨(姓氏)와 관련하여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자료이다.
이러한 족보가 핵 가족화 되면서부터 집안의 옛 어른이 조상(祖上)의 이야기를 하면 보수적인 사람으로 생각하기
일수이며, 퀘퀘묵은 옛날일을 이야기 한다면서 돌아서는 젊은 세대들이 많다.
"지금 사회는 돈이 최고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돈만 있으면 없는 족보도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던 자신도 점점 나이가 먹어가면서 자식들이 생기고 후손(後孫)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뒤늦게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고하며, 자식들에게는 자신의 모습을 닮지 않도록 하려고 한다.
바로 이 때에 자신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가 바로 족보(族譜)이다.
자신의 뿌리도 모르는채 살아가는 현재의 사회야 말로 내 자식에게 선조의 이야기를 해 줄 수가 없는 것이다.
현재의 사회는 선진국인 서구에서도 자신의 뿌리를 다소 형식이 틀리나마 서적 및 비디오로 출판을 하여 자손들에게 물려주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다.
오히려 서구 사람들이 우리의 족보와 역사(歷史)를 연구하여 우리보다 더 많은 정보(情報)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메스컴을 통하여 알고 있다.
더구나 족보의 근원지(根原地)가 아시아권인 중국이며, 우리나라의 족보처럼 유수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서구의 족보문화에 뒤질 수는 없다.
우리의 족보는 한 집안의 혈통을 기록한 피의 역사서이며 그 속에는 우리가 배울 인생의 지혜가 있고 참된 삶의 형태가 있다.
우리 후손들은 당연히 자신의 선조가 언제 태어나 어떻게 살다가 어디에 어떤 형태로 묻혔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은 후손된 도리로서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자신의 뿌리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선조의 묘가 없는 것이나 똑같은 것이다.
만약에 나의 손자가 나에게 선조에 대하여 물어 본다면 그 대답을 해주어야 한다.만약에 그냥 얼버무리다가는 후손 역시 그 뿌리를 찾기에는 더욱 더 힘들어 질 것이므로 역사의 산실인 족보는 산 역사인 것이다.

2, 족보의 역사

족 보의 근원은 중국(中國)이라 알려지고 있으며, 6조 시대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제왕연표가 그 시작이다.
개인이 족보를 갖게 된 것은 한나라 시절 현량과라는 제도 때문인데 과거 응시생의 집안내력을 올리게 하여 조상이 우수하면 벼슬을 주던 것이 그 시초라 할 수가 있다.
특히 북송(北宋)의 문장가 소순,소식 형제가 만든 족보는 후에 편찬되는 족보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우리 족보의 서(序)라는 것의 형태가 바로 이들이 만든 족보에서 본따 만든 형식이며 이 서문(序文)에도 이들 형제의 이야기가 가끔씩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의 족보(族譜)는 중국(中國)의 성씨제도(姓氏制度)라 할 수 있는 한식씨족제도(漢式氏族制度)를 근본으로 삼고 발전하여 왔다.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그 시기는 1000 여년전인 신라말·고려초기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옛 문헌(文獻)에 보면 고구려나 백제 계통의 성(姓)은 그 계보(系譜)가 후대와 거의 연계되고 있지 않으며 다만 신라의 종성(宗姓)과 육성(六姓)이 이(李), 최(崔), 정(鄭), 설(薛), 손(孫), 배(裵) 및 가락국계(駕洛國系)의 김해김씨(金海金氏)만이 후대의 계보(系譜)와 연결 되고 있음을 을 알 수가 있다.(최씨의 역사편에 상세히 기록)
우리나라의 족보는 고려시대 왕실계통을 기록한 왕대종록(王代宗錄)이 그 시작이며 훗날 족보편찬의 근원이 되게 하였다.
또한 고려사 열전은 부자관계(夫子關係)를 명확히 적었으며 특히 고려사 절요에는 고려에서도 양반 귀족은 씨족계보의 기록 보관을 중시하여 " 종부시(宗簿寺)라는 관제를 두고 관리하였다" 라고 기록을 하고 있어 당시의 일부 귀족들은 이미 족보를 소유하고 있었음을 밝혔다.
그 이후에는 귀족사이에서 가전(家傳),가첩(家牒),사보(私報) 등으로 기록하여 왔는데, 이러한 가계기록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중기에 오면서 족보(族譜)형태를 갖추는 가승(家乘), 내외보(內外譜),팔고조도(八高祖圖)등으로 발전을 하였다.
전해져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족보의 발행은 조선시대에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공신록(功臣錄), 조선명장전(朝鮮名將傳) 등이 정비되어 그 시조(始祖)나 부자 (父子)관계를 명확히 알 수 있게 되어 명문세족들의 족보편찬이 본격적으로 이루어 졌는데 지금까지 조선초기인 세종 5년(1423) 문화류씨영락보(文化柳氏永樂譜) 부터 간행되기 시작했다고 전하고 있으며, 그후 성종 7년(1476) 안동 권씨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가 체계적인 족보형태를 갖추었으며,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족보로는 문화류씨 두번째 족보인 1562년(명종 17년 간행의 10책)의 가정보(嘉靖譜)이다.
그 밖에 조선초기 간행된 족보는 남양홍씨 (南陽洪氏,1454), 전의이씨(全義李氏,1476), 여흥민씨(驪興閔氏, 1478), 창녕성씨 (昌寧成氏, 1493)등의 족보가 있다.
위와 같이 조선초기의 족보를 보게되면 족보의 수록은 친손(親孫), 외손(外孫)의 차별이 없이 모두 수록하고 있으며, 선남후녀(先男後女)에 관계없이 연령순위로 기재하고 있다.
또한 간행(刊行)시기와 수보(修譜) 간격을 보면 조선 초기에는 130년∼200년 사이를 두고 초간(初刊)과 재간 (再刊)이었는데, 조선중기 에는 50년∼60년, 조선후기20년 ∼30년를 지나면서 족보의 간행 간격이 점점 좁아지는 경향을 볼 수가 있다.
그것은 아직도 당시(조선초기)에는 동족집단이 형성되지 않았거나 또는 형성되었다 하더라도 그 동족의식이 약했기 때문 이라고 추정된다.
또한, 조선초(朝鮮初)에는 가문숭상(家門崇尙)의 사회적 풍토로 인한 천민과 양반 사이의 신분이 엄격했던 관계로 족보에 의한 신분이 유지 되어왔던 것과는 달리, 조선후기(朝鮮後期)와 현대(現代)로 오면서 본인과 후손의 사회적 신분을 유지하고 향상(向上)시키기 위한 증표로 삼기위하여 고증도 없이 관직(官職)등 신분을 미화하거나 과장, 조작하여 간행(刊行)하는 일들이 많았다.
특히 1909년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누구나 성(姓)과 본(本)을 가질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족보를 사고 팔거나 훔치는 일까지 자주 일어나면서 실제로 동족(同族)인지 상호의 혈연적 친근원소(親近遠疎)의 관계가 의심스럽기까지 하였다.
어떤 종족(宗族)이 족보(族譜)를 발간 했는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 되어있는 보첩(譜牒)들로 알아보면 일제강점기에 간행한 성(姓)의 종류는 125성(姓)에 달했으므로 마구잡이로 족보를 간행하는 일이 많았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 사이버족보소개 | 상세검색 | 이용안내 | 개인정보 보호정책 | 운영자소개 | 사이트맵 | 관리자회의실

전화번호 : 010-5219-8400 이용시간 18:00 - 21:00(개인사업장전화)/ 팩스번호 : / 메일문의 : cyberhaeju@naver.com
운영자 : 해주최씨 35세손 전한공파 躍童/安國 최승일(崔勝一) / 개인정보 관리책임자 : 현감공 33세손 최재만 / 개인정보 보호기간 : 회원탈퇴시
Copyright 2000 해주최씨 사이버족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 이메일 수집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