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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근원

씨족사회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시대

조선시대 와 현대

본 성씨의 대한 해설은 [한국인의 성씨]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타 중국한서 등의 문헌을 바탕으로 재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성씨(姓氏)의 근원(根源)
성(姓)은 혈족관계(血族關係)를 표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성(姓)이 언제부터 발생 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인류사회(原始社會)가 시작되는 원시시대(原始時代)부터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학자들의 견해이다. 그 이유는 원시사회(原始社會)는 혈연(血緣)을 기초(基礎)로 하여 모여 사는 집단체로 조직(組織)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처음에 모(母)만 확실히 알 수 있고 부(夫)는 알 수 없는것 이었다 한다.
그러므로 처음에 모계혈연(母系血緣)을 중심으로 모여 사는 모계사회(母系社會)가 나타났다가 뒤에 부계사회(夫系社會)로 전환되었거니와, 모계(母系)사회건 부계(夫系)사회건 원시사회는 조상(祖上)이 같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모여 살았던 것이다.
우리나라 성씨(姓氏)의 근원(根源)
우리나라의 성(姓)은 모두 한자(漢字)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중국문화(中國文化)를 수입(輸入)한 뒤에 사용한 것임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삼국유사]등 우리나라 옛 사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성(姓)은 시대(時代)별로 다음과 같은 유래를 가지고 있으며, 아래의 설명으로 삼국(三國)은 고대 부족국가 시대부터 성(姓)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모두 중국문화를 수입한 뒤에 지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국민 전체가 성을 쓴 것은 아니었다. 먼저 왕실에서 사용하고 다음에 귀족 관료층에서 사용하였다고 보여지는데,[삼국사기]와 [당서(唐書)] 이전의 중국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는 삼국(三國)의 성을 보면 왕실의 성을 쓴 사람이 가장 많이 나타나 있다. 고구려는고씨(高氏), 백제는 여씨(餘氏), 신라는 김씨(金氏)의 성을 가진 사람이 가장 많았다.
우리나라 성씨(姓氏)의 특성(特性)
위에서 나타난 우리나라에서 성씨(姓氏)를 가지게된 유래를 볼 때 우리나라의 성씨(姓氏)가 중국의 영향을받았다고 하는 것은 누구나 인정을 해야하는 사실이나, 성명(姓名)의 구성과 개념이 특이하고 고유한 점이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명을 살펴보면 성과 본관은 가 문(家門)을,명(名)은 가문의 대수를 나타내는 행렬(行列)과 개인을 구별하는 자(字)로 구성되어 있어 개인 구별은 물론 가문의 계대(系代)까지 나타나, 세계에서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성명(姓名)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인의 성(姓)은 가족 전체를 대표하는 공칭(共稱)이 아니라 원래의가계(家系) 그 자체를 본위로 한칭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속된 가정이 변동이 되더라도 즉, 어떤 사람이 혼인을 하여 예를 들면 호주가 이(李)성인데도 처는 김(金)성 이고, 며느리는 박(朴)성이라는 식이다. 중국 역시 한(漢)나라때에는 그와 같은 방법을 쓰게 되었는데, 그것은출가한 여자라 할지라도 부족(父族)과 부족(夫族)의,두 가족에 속하지 않는다는 관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성을 다만 가정을 표징한것으로, 가령 부모의 성이 김(金)이라면 자식의 성도 김(金),새로 온 며느리도 김(金)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안다. 한국의 그와 같은 성씨제도는 가족이 사회의 근간으로 되어 있는 경우에는 출가하더라도혈족 관념상 자기의 생족(生族)을 표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며, 그것이 또한 성씨(姓氏) 본래의 기능 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우기 한국에 있어서의 성씨(姓氏)는 다만 사람과 혈통의 표시에 끝나지 않고, 그 가족제도는 사회조직의 기초를 이뤄 사상·문화·도덕·관습의 근본이 되어 있는 극히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성씨제도의 하나인 사성(賜姓)은 국가에 공로가 있는 사람이나 귀화인에게 주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적인 제도로 나타난 성을 볼 때 거기에는 대체로 세가지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점에서 지난날의 성에는 여러가지 존비(尊卑)의 계급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거니와, 성(姓)의 문제는 우리 나라에서는 이처럼 특수한 기원(起院) 연혁(沿革)과 복잡한 조직, 관습이 있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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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족사회(氏族社會):원시사회의 성씨(姓氏)
씨족사회는 씨족전원이 힘을 합하여 수렵(狩獵),어로(漁撈),농경(農耕)에 종사하고 외구의 침입도 공동으로 방어(防禦)하였다.
그리고 씨족사회는 그 집단을 통솔하기 위하여 씨족원 중에 가장 경험이 많고 덕식이 있는 사람을 뽑아 씨족장(氏族長)으로 삼고, 일이 있을 때에는 씨족회의를 열어서 결정하였는데, 이 씨족회의(氏族會議)는 민주적(民主的)이어서 씨족원은 누구나 다 동등한 자격으로 참석하고 씨족 전원의 찬성으로 결정하였다.
씨족사회도 시대(時代)가 흐르고 인구가 증가하고 대(代)가 멀어짐에 따라 자연히 같은 씨족중에도 혈통이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 살게 되어 여러개의 씨족집단이 나타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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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사회(部族社會)의 성씨(姓氏)
위와같이 많은 씨족집단(氏族集團)이 나타나게 되자 자연히 가까이 있는 씨족들끼리 서로 합하여 더 큰 사회를 조직하고, 생산물을 교환하고 외적을 방어하였는데, 이렇게하여 부족사회(部族社會)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부족사회(部族社會)에서는 씨족장(氏族長)들이 모여서 부족장(部族長)을 선출하고 부족국가(部族國家)를 형성하였으며, 부족국가는 다시 부족연맹체를 조직하고 부족연맹의 왕(王)을 선출하여 국가생활을 영위하게 된 것은 오늘날 사회학(社會學),역사학(歷史學)의 상식으로 되어 있다.
이와같이 인류사회(人類社會)는 혈연에서 출발하고 혈연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 하였기 때문에. 원시시대(原始時代)부터 씨족에 대한 관념이 매우 강하였다.
자기 조상을 숭배하고 동족끼리 서로 사랑하고 씨족의 명예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고 각 씨족은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하여 각기 명칭이 있었을 것이며, 그 명칭은 문자를 사용한 뒤에 성(姓)으로 표현하였다.
동양에 있어서 처음으로 성(姓)을 사용한 것은 최초로 문자=한자(漢字)를 발명한 중국에서 가장 먼저 사용 하였으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명이 산명(山名), 강명(江名)으로 성(姓)으로 삼았다.
그 예로는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있었으므로 강(姜)씨라고 하였고,황제(黃帝)의 어머니가 희수(姬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희(姬)씨로 하였으며, 순(舜)의 어머니가 요허(姚虛)에 있으므로 성을 요(姚)씨로 한 것이 그 것을 실증(實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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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의 성씨(姓氏)
건국시조(始祖) 주몽(朱蒙)은 국호(國號)를 고구려(高句麗)라고 하였기 때문에 고(高)씨라고 하였으며, 주몽(朱蒙)은 충신(忠臣)들에게 성(姓)을 사성(賜性)하였는데, 재사(再思)에게는 극씨(克氏), 무골(武骨) 에게는 중실씨(仲室氏)를, 연거(연居)에게는 소실씨(小室氏)의 성을 사성(賜性)하였다고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중국 한서에 나타나 있는 인명(人名)의 기록을 보면, 주몽(朱蒙)은 이름만 기록되어 있으나, 장수왕때에 장수왕 이름을 고연(高璉)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고구려 왕실의 성을 고(高)씨로 기록 하였으며, 장수왕이 사신으로 보낸 고익, 마루, 손참구, 동마 등의 이름에도 모두 성(姓)을 사용하였다.
그 실증(實證)을 나타내는 것은, 중국 정사(正史)에 나타나 있는 삼국시대의 국왕과 기타 인명에
①[한서(漢書)]에는 왕망전(王莽傳)에 고구려후(高句麗侯) 추(騶)=주몽왕(朱蒙王)이 보이고,
②[후한서(後漢書)]에 고구려전에 추(騶)와 관(官)-태조왕. 성( 成)-차대왕(次大王). 백고(伯固)-신대왕(新大王)및 대가 승(大加 升)이 보이고,
③[삼국지]에는 고구려전·공손도전(公孫度傳)에도 추(騶)·관(官)· 성( 成)·백고(伯固)와 함께 이이모(伊夷模)-고국천왕(故國川王)·위관(位官)-산상왕(山上王)과 기타 대가(大加)·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등이 보이고,
④[진서(晉書)]에는 모용 전(慕容傳)에 소(고국원왕(故國原王))·安(광개토왕-光開土王) 이 보이는데, 모두 성(姓)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되었으며,
⑤[상서(床書)]에나 이르러 장수왕(長壽王)을 고련(高璉)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고구려 왕실의 성을 고(高)씨로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익(高翼)·마루(馬婁)·손수(孫漱)·구(仇)·동등(董騰)등 장수왕이 보낸 사신도 모두 성(姓)을 썼다.
이상으로 중국 정사(正史)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고구려는 장수왕 시대(419~491)부터 비로소 성(姓)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구려는 장수왕 시대부터 성을 쓰기 시작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3국(三國) 중에 제일 먼저 일어나고, B.C 107년에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인 현도군(玄도郡)이 고구려지방에 설치되어 건국 이전부터 이미 중국인과 접촉하였으며, 전한(前漢) 말기 왕망(王莽)시대(9~25)부터 중국과 교통하여 전한(前漢)·후한(後漢)·위(魏)·진(晉)의 문화를 수입하고,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前秦)으로부터 불교를 전해 오고 또 대학을 설치하여 장수왕 이전의 그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장수왕, 이후의 기록이기는 하나,
[위서(魏書)](북조-北朝) 고구려전에 주몽의 전설을 자세히 기록하고 성을 고(高)씨라 하였으며,
[삼국사기]에도 대무신왕(大武神王) 때의 좌보(左輔) 을두지(乙豆支), 좌보(左輔) 송옥구(松屋句), 태조왕 때의 좌우보(左右輔) 직도루(稷度婁)·고복장(高福章),신대왕(新大王)때의 국상 명림답부(明臨答夫), 산상왕 때의 국상 을파진(乙巴秦), 동천왕 때의 국상 고우루(高優婁)·명림어수(明臨於漱), 봉상왕(烽上王)때의 북부소형(北部小兄) 고노자(高奴子)등 장수왕 이전에 성을 쓴 사람이 많이 보이는 것을 보면, 고구려는 장수왕 이전에 이미 성을 쓴 듯하나, 어느 때부터 성을 쓰기 시작하였는지 그것은 확실히 알 수 없다.
요컨대 우리나라가 중국식 한자 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중국문화를 수입한 이후의 일로서, 고구려는 그 사용 연대를 확실히규정할 수 없으나, 대개 장수왕 시대부터 중국에 보내는 국서(국國書)에 고(高)씨의 성(姓)을 썼으며, 기타 을(乙)·예(禮)·송(松)·우(于)·주(周)·마(馬)·손(孫)· 동(董)· 예(芮)·연(淵)·명림(明臨)· 을지(乙支)등 10여종, 백제는 사(沙)·연(燕)·해(解)·진(眞)·국(國)· 목(木)·묘(苗)의 8족과 왕(王)·장(張)·사마(司馬)·수미(首彌)·흑치(黑齒) 등 10여종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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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百濟)의 성씨(姓氏)
시조(始祖)온조(溫祚)가 부여 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씨(扶餘氏)라 하였다 전해지고 있으나 (삼국사기,삼국유사) 중국의 후한서, 삼국지, 진서에는 왕명이 기록 되어 있는데 모두 성(姓)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 되어 있으며, 진서, 송서 등의 기록에는 근초고왕(13대) 부터 위덕왕(27대)까지는 여(餘)씨로 표시하다가 무왕(29대)부터 부여(扶餘)씨로 기록하였다.
[주: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여영(餘暎)-전지왕(典支王)· 여비(餘毗)-반유왕(畔有王)· 여경(餘慶-개로왕(蓋鹵王)·여융(餘隆)-무령왕(武寧王)·여명(餘明)-성왕(聖王)· 여창(餘昌)-위덕왕(威德王) 등과 같이 백제 왕실의 성을 여(餘)씨로 표시하였다가(진서(晉書)·상서(床書)· 남제서(南齊書)·량서(梁書) · 진서(陳書)·위서(魏書)·주서(周書)·남사(南史)·북사(北史)) 29대 무왕(武王)-부여장(扶餘璋) 부터 부여(扶餘)씨로기록하였다.]
이상 중국 정사(正史)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근초고왕 시대(346~376)부터 성(姓)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마한(馬韓) 50여개국 중의 한 나라로서 오랫동안 부족국가 생활을하다가 4세기 초에 마한(馬韓) 여러나라를 통일하고 근초고왕 27년(372)에 처음으로 동진(東晉)에 사신을 보내어 중국과 교류하였으므로 이 때부터 성(姓)을 사용하였다는 설이 가장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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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新羅)의 성씨(姓氏)
박(朴), 석(昔), 김(金) 삼성(三姓)의 전설이 전해 오고 있으며, 제 3대 유리왕 9년(32)에 육부(六部)=육촌(六村)의 촌장(村長)에게 성(姓)을 사성(賜性)하였다고 하는데 량부(알천양산촌)촌장에게는 이씨(李氏)를, 소작부(돌산고허촌)촌장에게는 최씨(崔氏)[유사에는 정씨(鄭氏)]를, 점량부(무산대수촌)촌장에게는 손씨(孫氏)를, 본피부(취산진지촌)촌장에게는 정씨(鄭氏)[유사에는 최씨(崔氏)]를 한지부(금산가리촌)촌장에게는 배씨(裵氏)를, 지북부(명활산고랑촌)촌장에게는 설씨(薛氏)의 성(姓)을 각각 사성(賜性)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김관가랑의 시조 수로왕도 황금 알에서 탄생하였다 하여 성(姓)을 김씨(金氏)라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러나 중국의 "북제서"에는 진흥왕(540~576)을 금진흥(金眞興)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김(金)씨라는 성(姓)을 사용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신라 진흥왕 시대(540~576)에 건립한 경남 창령, 서울 북한산, 함흥, 황초령, 단천 마설령에 남아 있는 진흥왕의 네 순수비(巡狩碑)와 진지왕 3년(578)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구의 무수오작비(戊戍塢作碑)와 진평왕 시대(579~632)에 건립된 경주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등에 나타나 있는 인명을 보면 성(姓)을 쓴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각 비문(碑文)에서 예(例)를 들면 다음과 같다.
*창령비(昌寧碑):진흥왕 22년, 561년 건립. 훼(喙) 거칠부지(居七夫智) 일척간(一尺干) 사훼(沙喙)=거사부지(居社夫智) 이간(伊干) 사훼(沙喙) 심표부지(心表夫智) 급척간(及尺干) 촌주(村主) 마질지(麻叱智) 술간(述干)
주:①이름 밑에 붙어 있는 지(智)· 지(知)는 존칭.
②일척간(一尺干)·이간(伊干)· 간( 干)·대아간(大阿干)·내말(奈末)·대사(大舍)·소사(小舍) 는 경위(京位) 즉 중앙관위를 말함.
③사훼(沙喙)= 량부(梁部) 즉, 알천영산촌(閼川楊山村)
*마운령비(磨雲嶺碑):진흥왕 29년 건립. 사훼부(沙喙部) 령력지(령力智) 간( 干) 본부(本部) 가량지(加良知) 소사(小舍) 간( 干)·일벌(一伐)은 외위(外位) 즉 지방인에게 주는 관위
주: ①훼부(沙喙部)=급량부(及梁部) 즉, 돌산고허촌 (突山高墟村)
②본부(本部)=본피부(本彼部) 즉, 취산지지촌을 말함.
위와 같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같이 유리왕 때에 6부(六部)에 사성(賜性)한 것이 사실이라면 훼부(喙部)는 이씨(李氏), 사부(沙部)는 최씨(崔氏), 본피부(本部)는 정씨(鄭氏)의 성(姓)을 써야 마땅한 것이며 성(姓)을 쓰지 않고 소속부명과 이름만 쓴 것을 보면 6부(六部)의 사성(賜姓)은 진평왕 이후의 일일 것이라 보는 학자가 많으며, 또 우리는 성(姓)보다 본(本)을 먼저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국민 전체가 성을 쓴 것은 아니었다. 먼저 왕실에서 사용하고 다음에 귀족 관료층에서 사용하였다고 보여지는데, 박(朴)·석(昔)·김(金) 3성과 6부의 이(李) ·최(崔)·정(鄭)·손(孫)·배(裵)·설(薛)의 6성 및 장(張)·요(姚) 등 10여종에 불과하다.
앞에서 본 것처럼 진흥왕순수비에 성(姓)을 쓴 사람이 하나도 없고, 또 [삼국사기]에도 성(姓)을 쓴 사람보다 쓰지 아니한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보면 귀족·관료들도 다 성(姓)을 쓴 것은 아니었다.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람, 예를 들면 김인문(金仁問), 김정종(金貞宗), 박우(朴祐), 김지량(金志良),김의충(金義忠), 등과 같이 사신이 되어 당(唐)나라에 갔다 온 사람, 최치원(崔致遠)·최리정(崔利貞)·박계업(朴季業)· 김숙정(金叔貞)등과 같이 당나라에 유학한 사람, 장보고(張保皐)와 같이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청해진 대사가 되어 동야의 제해권(制解權)을 잡고 당나라와 일본에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姓)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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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高麗時代)의 성씨(姓氏)

고려의 태조 왕건은 개국 공신들과 지방 토호세력들을 통합 관장하기 위하여 전국의 군·현 개편작업과 함께 성(姓)을 하사 하면서 우리나라 성씨(姓氏)의 체계가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 태조 의 부장인 홍술(弘述)·백옥(白玉)·삼웅산(三熊山) ·복사귀(卜沙貴)등은 모두 성(姓)을 쓰지 아니하였다. 이 중에 고려 태조의 부장인 홍술(弘述)·백옥(白玉)·삼웅산(三熊山)·복사귀(卜沙貴)는 고려 태조를 추대한 개국공신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의 초명으로서 각각 부계홍씨(缶溪洪氏) 경주배씨(慶州裵氏)·평산신씨(平山申氏) ·목천복씨(목川卜氏)등의 시조가 되는데, 그들이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으로 개명한 것은 고려 건국 후 그들이 귀하게 된 뒤의 일이며, 아마 태조로부터 사성되었을 것이라 보고 있다.
고려 태조는 사성한 예가 많이 있다.
지금의 강릉지방을 관장하고 있던 명주장군(溟州將軍) 순식(順式)이 귀순하자 태조는 왕(王)씨의 성을 주고, 발해태자(渤海太子) 대광현(大光顯)이 귀순하자 또한 왕(王)씨의 성을 주고, 신라인 김신(金辛)이 태조를 보필하여 권능이 많은 까닭에 권씨(權氏)의 성을 주어 안동권씨(安權氏)의 시조가 되었으며, 또 [동국흥지승람(東國興地勝覽)]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개국한 뒤 목천(木川) 사람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키므로 태조는 이를 미워하여 우(午)·마(馬)·상(象)·돈(豚)· 장(獐)과 같은 짐승의 뜻을 가진 자로 성(姓)을 주었는데, 뒤에 우(午)는 우(于), 상(象)은 상(尙),돈(豚)은 돈(頓),장(獐)은 장(張)으로 고쳤다는 설이 있다.
이것은 어떻든 고려 초기부터 귀족 관료들은 거의 성(姓)을 쓰게 되었으나, 고려 중기 문종(文宗) 9년(1055)에 성(姓)을 붙이지 아니한 사람은 과거에 급제할 자격을 주지 아니하는 법령을 내린 것을 보면, 문종시대까지도 성(姓)을 쓰지 아니한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종 9년의 이 법령은 실로 우리나라 성(姓)의 한 시기를 긋는 것으로서, 이때부터 성(姓)이 보편화 되어 일반민중이 성(姓)을 쓰게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문종 이후의 사람을 시조(始祖)로 하는 성씨(姓氏)가 많아졌다. 노비 등 천인 계급에 이르러서는 조선 초기까지도 성(姓)을쓰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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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朝鮮時代), 현대(現代)의 성씨(姓氏)

조선초기 성은 양민에게 까지도 보편화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 등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姓)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09년 새로운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어느 누구라도 성(姓)과 본(本)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姓)을 취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를 기회로 성(姓)이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을 담당한 동(洞)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姓)을 지어 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姓)과 본관(本貫)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문집안의 성씨(姓氏)를 모방하여 성(姓)을 정하였다. 그러므로 성씨(姓氏)의 종류수가 더욱 늘어났다.
따라서 1930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성씨가 많아졌다.
우리나라 성(姓)의 수(數)는
1486년(성종)에 편찬한 [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277성, 영조(21대)에 이의현(李宜顯)이 편찬한 [도곡총설(陶谷叢說)]에는 298성, 1908년(고종)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496성 (숫자가 많은 것은 고문헌에 있는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으로 되어 있으나 1930년 국세조사에서는 250성, 1960년 국세조사에는 258성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최근의 조사인 199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74개의 성씨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일제식민 통치하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일환으로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라며 1939년에 시행한 창씨개명은 1945년 해방과 1946년 10월 23 일 미군정이 공포한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에 따라 이름을 다시 찾을 때 까지 우리나라 성씨((姓氏) 역사의 가장 큰 수난기였다.
이후에도 국제화 시대를 맞아 외국인의 귀화 등으로 새로운 성씨와 본관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지금도 많은 성씨(姓氏)가 생기고 있다고 하며 2000년말에 실시한 "인구 센서스"에 통계적으로 나타날 것이나 현재까지는 1995년의 통계에 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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