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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고려사절요에 나타난 문헌공(文憲公) 부분을 발췌한 내용 입니다.
고려사절요 제2권 목종 선양대왕(穆宗宣讓大王) 을사 8년(1005), 송 경덕 2년ㆍ거란 통화 23년
○ 여름 4월에 최충(崔冲) 등 7명과 명경 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고려사절요 제3권 현종 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계축 4년(1013), 송 대중상부 6년ㆍ거란 개태 2년
○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 최항(崔沆)을 감수국사(監修國史)로, 예부상서 김심언(金審言)을 수국사로, 예부시랑 주저(周佇)와 내사사인(內史舍人) 윤징고(尹徵古)ㆍ시어사(侍御史) 황주량(黃周亮)ㆍ우습유(右拾遺) 최충(崔冲)을 모두 수찬관(修撰官)으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제3권 현종 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경오 21년(1030), 송 천성 8년ㆍ거란 태평 10년
○ 최유선(崔惟善) 등 18명에게 급제를 내려 주고 왕이 시를 지어 내려주어 특별히 권장하였다.
고려사절요 제3권 현종 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신미 22년(1031), 송 천성 9년ㆍ거란 흥종(興宗)
○ 경복(景福) 원년 신미일에 왕의 병환이 위독하자 태자 흠(欽)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고 조금 후에 중광전(重光殿)에서 훙하였다.
○ 시호를 원문(元文)이라 올리고 묘호를 현종(顯宗)이라 하였다.
○ 태자가 즉위하여 익실(翼室)에 거처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슬피 울었다.
사신(史臣) 최충(崔冲)이 말하기를, “옛글에 일컫기를, '하늘이 장차 일으키려 하면 누가 능히 그를 폐 하리오.' 라고 하였다. 천추태후(千秋太后)가 음란하고 방종하여 몰래 나라를 위태롭게 하여 왕위를 빼앗으려 하였는데, 목종께서 백성들이 현종의 촉망함을 알아 천추태후의 악당(惡黨)을 배제하고 멀리 사자를 빨리 보내 맞아와 왕위를 전하여 왕실이 튼튼하도록 하였으니, 이른바 '하늘이 장차 일으키려 하면 누가 능히 그를 폐하리오.' 하는 말을 어찌 믿지 아니하랴. 그러나 이모(姨母 천추태후)가 끼친 화근으로 인하여 병권(兵權)을 가진 신하[戎臣 강조(康兆)를 가리킴]가 반역을 일으키고, 강한 인국(隣國 거란)이 틈을 엿보아 침범하여 서울의 궁궐이 모두 잿더미가 되어 임금이 파천하니 불행이 극도에 달하였다.
반정(反正)한 뒤에는 오랑캐와 화호를 맺고, 전쟁을 멈추고 문덕(文德)을 닦으며, 부세를 가볍게 하고 요역을 가볍게 하며, 준수한 인재를 등용하고 정사를 공평하게 하여 서울과 지방이 평안하고 농업과 잠업이 자주 풍년이 들었으니 나라를 중흥시킨 왕이라 이를 수 있다." 하였다.
이제현이 말하기를, “최충(崔冲)의 말은 세상에서 이른바 천명(天命)이다.
구천(句踐)은 쓸개를 씹어 회계산(會稽山)의 치욕을 씻었고, 소백(小白)은 거(?)의 고난(苦難)을 잊었기 때문에 화환(禍患)을 제(齊) 나라에 남기었다. 왕이 천명만 믿고 욕심을 방종히 부려 법도를 파괴하면 비록 나라를 얻었을지라도 반드시 잃고 마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군자는 세상이 다스려질 때에 어지러워질까 생각하고 편안할 때에 위태로워질까 생각하여, 끝을 신중히 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여 천명에 보답하니, 현종과 같은 이는 공자가 이른바 '나는 그에게 불만이 없다.'는 것이다." 하였다.
고려사절요 제4권 덕종 경강대왕(德宗敬康大王) 갑술 3년(1034), 송 경우(景祐) 원년ㆍ거란 중희 3년
○ 여름 4월에 동지중추원사 최충(崔冲)이 아뢰기를, “성종(成宗) 때에 안팎 모든 관청 벽에 모두 《설원(說苑)》의 육정 육사(六正六邪)의 글과, 한 나라 자사의 육조령(六條令)을 써서 붙이게 하였는데, 지금은 세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다시 새로 써 붙여서 벼슬에 있는 사람에게 신칙하고 격려한 바를 알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이단을 문하시랑 평장사로, 민가거(閔可擧)와 유징필을 상서 좌우복야로, 황보유의를 내사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로, 최충(崔冲)을 형부상서 중추사로 삼았다.
이제현이 찬하기를, “경릉조(慶陵朝) 때 두타산인(頭陀山人) 이승휴(李承休)가 《제왕운기(帝王韻記)》를 지어 올렸는데, 그 중에, '덕은 어찌하여 4년 만에 그쳤느냐. 봉새가 날아와 상서를 아뢰었네.' 하였다.
실록(實錄)》을 상고하건대 그런 일을 볼 수 없으나, 다만 속담에 전하기를, '봉새가 위봉문(威鳳門)에 날아와 춤추니, 뭇 까마귀들이 따라다니며 지저귀어 봉새는 그만 날아가 버렸다. 나랏사람들이 까마귀를 미워하여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활을 가지고 쏘아서 덕종 한 시대에는 서울에 까마귀가 없었다.' 하니, 대저 봉새는 날짐승의 우두머리인데 뭇 까마귀에게 쫓겨 갔다면 어찌 봉새라 할 수 있는가. 그러니 대개 《제왕운기》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덕종이 상중에 능히 아들로서의 효도를 극진히 하였고, 정사를 하는 데에 그 아버지가 하던 일을 고치지 않았으며, 옛 신하인 서눌(徐訥)ㆍ왕가도(王可道)ㆍ최충(崔冲)ㆍ황주량 같은 무리를 임용하여 조정에는 속이거나 숨기는 자가 없었고, 백성은 생업에 편안하였으니, 비록 봉새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존호를 덕이라고 올림이 또한 마땅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고려사절요 제4권 정종 용혜대왕(靖宗容惠大王) 을해 원년(1035), 송 경우 2년ㆍ거란 중희 4년
○ 봄 정월에 최충(崔冲)을 중추사 형부상서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제4권 정종 용혜대왕(靖宗容惠大王) 정축 3년(1037), 송 경우 4년ㆍ거란 중희 6년
○ 건덕전에 거둥하여 선마하여 유징필을 내사시랑 동 내사문하평장사로, 황주량을 내사시랑 동 내사문하평장사 판상서 예부사로, 최제안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중추사로, 최충(崔冲)을 참지정사 수국사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제4권 정종 용혜대왕(靖宗容惠大王) 경진 6년(1040), 송 강정(康定) 원년ㆍ거란 중희 9년
○ 가을 7월에 양대춘(楊帶春)을 안북대도호부부사로 삼으니, 좌복야 최충(崔冲)이 아뢰기를, “대춘은 의지가 높고 지략이 많으며, 군대의 일에 익숙하니, 만일 변방에 근심이 생기면 이 사람 외에는 보낼 만한 사람이 없는데, 지금 밖으로 내보내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고려사절요 제4권 정종 용혜대왕(靖宗容惠大王) 신사 7년(1041), 송 경력(慶曆) 원년ㆍ거란 중희 10년
○ 8월에 판서북로병마사 상서좌복야 최충(崔冲)에게 명하여 순시하게 하였는데, 왕이 편전에 거둥하여 옷을 내려주고 보냈다.
최충(崔冲)을 내사시랑 평장사로, 황보영을 수사공 좌복야(守司空左僕射)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제4권 정종 용혜대왕(靖宗容惠大王) 계미 9년(1043), 송 경력 3년ㆍ거란 중희 12년
○ 2월에 최제안(崔齊顔)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로, 최충(崔冲)을 수사도수국사상주국으로, 황보영(皇甫穎)ㆍ이작충(李作忠)을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제4권 정종 용혜대왕(靖宗容惠大王) 병술 12년(1046), 송 경력 6년ㆍ거란 중희 15년
○ 8월에 선정전(宣政殿)에 거둥하여 시중 최제안과 평장사 최충(崔冲) 등을 불러 당시 정사의 잘잘못을 의논하였다.
고려사절요 제4권 문종 인효대왕 1(文宗仁孝大王一) 정해 원년(1047), 송 경력 7년ㆍ거란 중희 16년
최충(崔冲)을 문하시중으로, 김영기(金令器)를 문하시랑 평장사로, 김원충(金元?)을 내사시랑 평장사로, 박유인(朴有仁)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로, 이자연(李子淵)을 이부상서 참지정사로 삼았다. 전례(前例)에는, 선마(宣麻)하는 날 재신 한 사람이 조서 담는 책상을 들어서 조서를 읽는 사람에게 주었는데, 이때에는 다섯 재상이 같은 날 선마하게 되었으므로 특별히 합문사에게 명하여 조서 담는 책상을 들이게 하고, 이어 일정한 격식으로 삼았다.
○ 6월에 제하기를, “법률은 형벌의 판례이다. 법률이 밝으면 형벌에 지나침이 없고, 법률이 밝지 못하면 죄의 경중이 잘못되는 것이니, 지금 쓰는 율령이 어떤 것은 그릇된 것이 많아서 참으로 마음에 걸린다.
시중 최충(崔冲)을 시켜 여러 율관(律官)을 모아 거듭 자세히 상고하여 진실로 마땅하게 하는 데 힘쓰고 서업(書業)과 산업(算業) 또한 살펴 바루도록 하라." 하였다.
최충(崔冲) 등을 문덕전(文德殿)에 불러서 군국(軍國)의 여러 정무를 물었다.
고려사절요 제4권 문종 인효대왕 1(文宗仁孝大王一) 경인 4년(1050), 송 황우 2년ㆍ거란 중희 19년
○ 문하시중 최충(崔冲)을 개부의 동삼사 수태부로 삼고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의 호를 내려 주었으며, 김원충을 문하시랑 평장사 판상서 형부사로, 이자연을 내사시랑 평장사로, 정걸을 중추원사 한림학사승지로 삼았다.
○ 11월에 도병마사 문하시중 최충(崔冲) 등이 아뢰기를, “서북의 주ㆍ진이 지난해에 흉년이 듦으로 인하여 백성이 가난하고 궁핍하여 남자는 부역에 지치고 여자는 꾸어먹은 쌀을 갚느라 지치니, 어떻게 견디어 나가겠습니까. 성지를 수선하는 외에 일체 역사는 모두 금단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최충(崔冲)이 아뢰기를, “동여진 추장 염한(鹽漢) 등 85명이 일찍이 여러 차례 국경을 침범하여 변방 백성을 노략질해 갔으므로 경관(京館)에 억류한 지가 오래되었으나, 오랑캐는 겉만 사람이고 속은 짐승이어서 형법으로도 응징할 수 없고 인의로도 교화할 수 없습니다. 구류시킨 지가 이미 오래되어 앙심을 먹고 원한을 품을 것이며, 수구(首丘)의 정이 반드시 그 근본을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고 또 드는 비용이 너무 많으니, 모두 놓아 보내소서." 하니, 따랐다.
고려사절요 제4권 문종 인효대왕 1(文宗仁孝大王一) 계사 7년(1053), 송 황우 5년ㆍ거란 중희 22년
○ 제하기를, “시중 최충(崔冲)은 대대로 유종(儒宗)이며 삼한의 기덕(耆德)이었다. 지금 비록 늙어서 물러가겠다 하나 차마 윤허할 수 없으니, 해사(該司)를 시켜 옛 법을 상고하여 궤장을 내려주어 일을 보게 하라." 하였다.
고려사절요 제4권 문종 인효대왕 1(文宗仁孝大王一) 을미 9년(1055), 송 지화 2년ㆍ거란 도종(道宗) 청녕(淸寧) 원년
최충(崔冲)을 내사령으로 삼아 그대로 치사하게 하고, 이자연을 문하시중 판상서 이부사로, 김정준을 내사시랑평장사로, 박성걸을 내사시랑평장사 상주국으로, 김원정(金元鼎)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겸 태자소보로 삼았다.
○ 지중추원사 최유선(崔惟善)과 공부시랑 이득로(李得路)를 보내 거란에 가 조상하고, 회장(會葬)하였다.
고려사절요 제5권 문종 인효대왕 2(文宗仁孝大王二) 무술 12년(1058), 송 가우 3년ㆍ거란 청녕 4년
○ 여름 4월에 최충(崔冲)을 내사령으로 올렸더니 치사하므로, 의대와 은그릇ㆍ비단ㆍ포백과 안장 갖춘 말 등의 물품을 하사하였다. 고려 광종 18년 정묘(967) 3월에 다섯 별(목성.화성.토성.금성.수성)이 규성(奎星)에 모여들었다.
이때부터 천하가 태평하여 두의(竇儀 :宋나라 漁陽人)가 천문역법(天文曆法)을 운영하였으며 주(周)나라 대리평사(大理評事) 쌍기(雙冀) 또한 천문에 정통하여 책봉사(冊封使) 설문우(薛文遇)를 따라 고려에 왔다가 귀화하여 과거제도를 베풀었다.
성종 5년 병술(986) 충(冲)은 지금의 해주(海州) 향교자리인 옛집에서 출생하였다.
중국 상(商)나라가 건국한 뒤 첫번째 병술년에 기자(箕子)가 태어났으니 그 뒤 36번째 병술(丙戌)인 동시에 송(宋)나라 건국 후 첫번째 병술년(丙戌年)이기도 하다.그 사이는 무려 216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충이 태어나던 날부터 수양산(首陽山)이 울고 용수산(龍首山) 봉우리가 허물어 졌으며 산봉 위로 구름과 노을이 온 마을에 둘러 쌓인 채 3일동안이나 걷히지 않았다.
또한 얼마 전부터 수양산(首陽山) 남쪽 기슭의 풀과 나무가 모두 말라 죽는 이변이 생기기도 하였다.
충은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고 글짓기를 잘하여 나이 10세때 목사 김흥조(金興祖)가 직접 데리고 개성(開城)에 올라가 학문을 시험하였는데 이미 해박하여 모난 구석이 없는지라 모두가 경탄하며 장차 문운(文運)을 주름 잡을 큰 인물로 여기게 되었다.풍모는 신체(身體)가 크고 훌륭하였으며 성품(性品)과 행실(行實) 또한 정도(正道)에 어긋남이 없었다.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깊이 연구하고 깨달아 아는 것이 많았고,천리(天理)와 인사(人事)에도 두루 통달하였으니 그야말로 금옥(金玉)같은 지조(志操)요,수월(水月)같은 정신(精神)이었다.
목종 8년 을사(995) 4월에 충은 약관 20세 나이로 문과(文科)에 급제하니 갑과장원(甲科壯元)이었다.이때의 지공거(知貢擧)는 최 항(崔沆 :경주인)으로 과장을 열어 대궐 안쪽 문을 잠그고 예경(禮經) 10조를 붙여 놓고 이튿날 시(詩)와 부(賦)를 짓고 또 하루를 지나 시무책(時務策)을 시험하고 10일이 되어 갑과 7인,을과 10인,명경 3인을 급제시켜 왕께 아뢰었다.이어 서경(西京 :평양)의 장서기(掌書記)로 보임받았으나 직언(直言)으로 인하여 파직당하였다.
현종 원년(1010) 새 왕의 부름을 받고 고민하면서 출사(出仕)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현재의 왕은 바른 천명을 이어 왕통(王通)을 이었고 전 왕(前王)의 시해는 강 조(康兆 :신천인)의 짓이지 지금의 왕이 그런 것은 아니다.모름지기 정치란 만 백성을 위한 것이요 한 사람의 안위만을 지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듬해 우습유(右拾遺)를 거쳐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이 되었고 태조에서 목종까지의 실록(實錄)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이해 5월에 큰아들 유선(惟善)이 태어났다.
이때 거란은 현종의 즉위를 문제 삼아 고려에 침략하였는데 충이 당시 예부시랑 강감찬(姜邯贊 :금천 강씨 시조)으로 하여금 각 진의 항복의 뜻을 버리게 하였고 하공진(河拱辰 :진주 하씨 시조)을 천거,적을 기만하는 책략을 사용할 것을 권하여 국왕의 옥체를 보전케 하였다.이에 뒷날 문정공(文貞公) 신 현(申賢 :평산인)이 말하기를『위대하구나 강감찬 장군이여! 문헌공(文憲公 :冲)이 자신을 추천하는 것을 의심치 아니하고 스스로의 생각을 버리고 현자(賢者)에게 순종하였으며 반드시 자문을 구하여 계책을 세웠으니 우리가 오랑캐가 되지 않은 것은 오로지 강감찬의 덕이다』하였다.그러나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원주인)은『세상사람들은 거란병을 물리친 것에 대하여 최 충의 숨은 공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왕이 강감찬을 찬양한 싯구 만을 가지고 모두 그의 공(功)이라고 말하니 이것은 참으로 잘못된 견해이다』하면서 그 공적의 근원을 최 충(崔 )에게 두었다.
현종 5년(1014) 문관직인 대각(臺閣)직을 무관들도 겸직토록 제도를 바꾸자 충이 앞장서 그 부당함을 지적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으므로 스스로 사직하고 중학(中學)을 건립,구재(九齋)를 열어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다.이것이 곧 우리나라 사학(私學)의 효시로서 충을 해동공자(海東孔子)라 칭하는 계기가 되었다.현종 8년(1017) 충의 나이32세였는데 중국 송(宋)나라에서는 주염계(周濂溪)가 태어났다.유현록(儒賢錄)에는『충은 주염계(周濂溪)나 정자(程子)형제들 보다 먼저 태어나 우리의 유도(儒道)를 처음으로 밝혔다』고 기록하고 있다.이는 곧 주염계(周濂溪)와 정자(程子) 형제의 학문(學文)이 충(冲)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밝히는 것이다.그 후 지공거(知貢擧)를 거쳐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고 태자중윤(太子中允),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태자우유덕(太子右諭德)이 되었다.
덕종 원년(1032)에 다시 우산기상시(右散騎常時)로 영전되고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어 육조지령(六條之令)을 여러 관청 벽에다 써 붙이게 하였다.이어 형부상서(刑部尙書)가 되고 정종 2년(1036)에는 정상이 딱한 죄인에게는 교수와 도참을 금지하고 귀양을 보냈는데 이로서 살아남은 사람이 무려 160여명이었다.
정종 3년(1037) 큰손자 사제(思齊)가 태어나고 충은 건덕전(乾德殿)에서 좌복야 참지정사 수국사(左僕射 參知政事 修國史)의 임명의식을 가졌으며 현종실록(顯宗實錄)을 편찬하였다.이어 궁궐 안의 짐승사육을 금지시켰고 정종 6년(1040) 7월에 나라에서 양 규(楊規)의 아들 양대춘(楊帶春)을 안북대도호부사(安北大都護副使)로 삼아 파견하려 하자 다음같이 반대하였다『대춘은 뜻이 높고 뛰어나며 지모와 담략이 능하다 만약 변방에 근심이 있을 때는 이 사람이 아니면 그 화를 면하기 어려우니 밖으로 내보내면 안된다』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충은 56세(1041년)의 나이로 판서북로병마사(判西北路兵馬使)가 되어 영원(寧遠),평로(平虜)등의 여러 진(鎭)과 보(堡)를 14개소 설치하였다.이해 12월에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내사시랑 평장사(內史侍郞 平章事),수사도 수국사 상주국 문하시랑(守司徒 修國史 上柱國 門下侍郞)이 되었다.문종 원년(1047) 4월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는데 김영기(金令器 :?),김원충(金元 :경주인),박유인(朴有仁 :울산인),이자연(李子淵 :인천인)등이 함께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이 날 5명의 재상이 같이 사령장을 받았으므로 합문(閤門)이라 하여 이후부터 오래도록 법이 되었다.이때 충은 율령(律令)을 가르침으로서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하였고,문종 4년(1050)에는 도병마사(都兵馬使)로서 모든 공역(工役)을 중단 시켰으며 포로가 된 여진의 추장 염 한(鹽漢)등,86인을 방면하기도 하였다.
문종 9년(1055) 70의 나이로 은퇴할 것을 요청하니 왕은 내사시랑 평장사 김원정(金元鼎 :경주인)과 동지중추원사 왕무숭(王懋崇 :개성인)을 사택에 보내어 내사령(內史令)에 승급하여 치사케 하는 조서를 내리고 말,의복,채색비단,은제그릇등과 함께 고신(사령장)을 보냈다.그 내용은 이러하다.
조서『그대는 학계의 표준이며 행정부의 빛나는 존재다.문필로 여러 임금을 섬겼으니 나라를 빛낸 문장이며 재상자리에 올라 정책을 결정하였으니 공적은 역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은퇴하여 한가로이 지낼지라도 옛날의 공덕을 잊을 수 없다 다시 작위를 올리어 은거하는 집에 영광이 미치게 하노라』
사령장『훌륭한 신하를 얻은 임금이라야 성군(聖君)이 된다.그러므로 순은 팔원(八元)을 등용하였고 인재가 있는 나라는 왕성한다.주(周)나라는 네 사람을 맞이하여 대신의 자리를 주기도 하고 스승으로 삼기도 하였다.
충성하며 현명한 직언을 받아들여 성인의 정치를 장식하였고 나라를 바로잡는 지혜를 힘입어 임금의 식견을 보좌하였다.좋은 정치를 실현하고 영원한 영광의 길을 열어놓을 훌륭한 그 사람을 이제 나는 얻었노라.
당(唐) 태종이 과거에서 인재를 얻고 기뻐하던 바와 같이 그대는 니형이 모든 사람 위에 솟아나듯이 우리 조정에 들어오게 되었다.만 길이나 되는 금산과 같은 량(梁)의 주승(朱昇)보다 낫고 천하제일의 성적으로 과거에 오른 진(晋)의 도선을 숲속에 솟아난 한 가지의 계지(桂枝)라 하였다.재능이 많은 것으로는 숙향(叔向)도 수례를 잡고 만류할 것이요 아는 것이 많은 것으로는 장화(張華)도 자리를 물러설 것이다.
정책을 세우는 것은 두여회(杜如晦)와 같다고 칭찬을 보냈고 모든 사람의 우두머리가 된 것은 위서(魏舒)와 다름이 없었다.항상 나에게 덕을 닦으라는 충고를 주었고 정치를 바르게 인도하였다.하지장(賀知章)처럼 호수(湖水)가에서 자연을 즐긴다 할지라도 국가의 중요한 문제가 있을 때는 언제나 산중으로 도홍경(陶弘景)을 찾아가서 자문받던 고사를 따르리라.
과거에는 그대의 움직임이 백성의 표본이 되었는데 이제부터는 들어앉아서도 세상사람들의 스승이 되겠구나.내가 최고의 계급으로 올리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그 존대의 성의를 나타내리오. 그리하여 중서성(中書省) 최고의 작위(爵位)를 주어 모든 관료 위에 이름을 얹어 놓았으니 순(舜)과 주(周)나라에 못지 않게 하며 팔원(八元)과 네 신하만 미명을 독차지 않게 하라』
문종 19년(1065) 충은 나이 80에 추충찬도 동덕윤리 홍문의유 보정수정 강제공신 금자광록대부 벽상 삼한 삼중 대광태사 중서령 판상서 이부사 상주국 양평부원군(推忠贊道 同德允理 弘文懿儒 保定 綏靜 康濟功臣 金紫光祿大夫 壁上 三韓 三重 大匡太師 中書令 判尙書 吏部事 上柱國 陽平府院君)의 호칭을 더하고 문종 22년(1068) 9월15일에 별세하였다.나라에서 시호를 논의하여 문헌(文憲)으로 정하니 시법(諡法)은 도덕을 널리 펼쳤으므로 문(文)이라 하고 널리 들어 다능했으므로 헌(憲)이라 하였다.
고려학자 이제현(李齊賢 :경주인)과 조선학자 서거정(徐居正 :대구인)이『우리나라의 문물이 더욱 성하고 이로부터 뛰어난 문사가 많이 나와 중국에서조차 시서(詩書)의 나라로 일컬어져 지금에 이른 것은 오로지 최 충의 덕택이다』라고 극찬하였다.당시 12공도는 최 충(崔 :해주인)의 문헌공도, 시중 정배걸(鄭培傑 :초계인)의 홍문공도. 참정 노 단(盧旦 :장연인)의 광헌공도. 좨주 김상빈(金尙賓)의 남산도. 복야 김무체(金無滯)의 서원도. 시랑 은 정(殷鼎 :행주인)의 문충공도. 평장사 김의진(金義珍 :경주인)의 양신공도. 평장사 황 영(黃瑩)의 정경공도. 유 감(柳監)의 충평공도. 시중 문 정(文正 :장연인)의 정헌공도. 서 석(徐碩)의 서시랑도. 귀산도는 창립자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그 중 최 충의 문헌공도(文憲公徒)가 가장 왕성하였으며 최상위 학교로서 대우받았다.충은 말년에 벼슬길에 있던 두 아들 유선(惟善)과 유길(惟吉)에게 다음같은 詩로서 수신제가를 당부하였다.

戒二子詩『吾今戒二子 付與吾家珍 淸儉銘諸己 文章繡一身 傳家爲國寶 繼世作玉臣 莫學紛華子 花開一餉春』
나는 이제 두 아들을 경계하며 우리 집안의 보물을 주려한다.청렴과 검소함을 마음깊이 새겨두고 문장으로 나의 몸을 장식하여라.집안에 전하여 나라의 보물이 될 것이며 대를 이어 임금의 신하가 될 것이다.
허영을 숭상하는 사람을 본뜨지 말라 꽃이 피어도 봄 한철뿐이니라.집안대대로 좋은 물건은 없으나 귀중한 보물만은 간직해 왔다.문장을 비단으로 여겼고 덕행이 곧 옥이니라.내가 지금 너희에게 이르는 말을 다른 해에 부디 잊지 말아라.그러면 나라에 중히 쓰이게 되며 자손은 더욱 번창하리라.
고려 의종 24년(1170) 무신 정중부(鄭仲夫)가 난을 일으켜 대궐 안밖에 있던 충의 문집등을 닥치는대로 불태우고 남은 것이 없었다.
훗날 회헌(晦軒) 안 유(安裕 :순흥인)와 역동(易東) 우 탁(禹倬 :단양인),불훤재 신 현(申賢 :평산인)등이『중국 진(秦)나라 이 사(李斯)의 분서갱유(焚書坑儒)와 같다』하며 크게 슬퍼하며 탄식하였고 조선 朝의 영의정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경주인)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상촌(象村) 신 흠(申欽)등이 말하기를『우리가 본래 문명한 나라라 일컬어졌지만 기자(箕子)이후에 학문에 있어서는 끊어져 없어졌다.
비록 홍유후(弘儒侯) 설 총(薛聰)과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이 문묘에 배향되기는 하였으나 한낱 문한의 선비에 지나지 않는다.비로서 고려에 이르러 훌륭한 선비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문헌공 최 충이 가장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성리학의 계통이 기자(箕子)로부터 최 충에게로 이어졌으니 충은 마땅히 우리나라 학문의 사표(師表)이다』하였다.
또한 중경지(中京誌)와 해동야승(海東野乘)에도『신라와 고려시대는 중국의 풍속이 아직 물들지 않은 때였는데 최 충은 성리학의 대가(주염계와 정자형제)들 보다 이른 시기에 태어나 외로이 성리학(性理學)을 천명하고 그 설을 제창하였으며 구재(九齋)를 설립하고 학도들을 가르쳤다.
그러니 충은 우리 동방 성리학의 시조이다』하였다. 결국 충에 의해 확립된 우리나라 순정유학(醇正儒學)의 정통(正統)이 훗날 회헌 안 유(安裕)와 역동 우 탁(禹倬)등을 거치면서 좀 더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충의 당시 사우(師友)로는 살수대첩의 영웅 인헌공 강감찬(姜邯贊 :금천인)을 비롯하여 문하시랑 왕가도(王可道 :청주인),황보유의(皇甫兪義 :영천인),참지정사 이 단(李端),주 공(周貢),문하시중 최제안(崔齊顔 :경주인),문하시중 황주량(黃周亮),예부시랑 유징필(劉徵弼),평장사 김원충(金元 :경주인),참지정사 박유인(朴有仁 :울산인),평장사 김영기(金令器),이자훈(李子訓 :인천인),최 상(崔尙 :경주인),민창수(閔昌壽),호부시랑 안민보(安民甫),참지정사 김약진(金若珍),이유적(李攸績),중추부사 장연우(張延祐 :흥덕인)등이 있으며,
문인(門人)으로는 유선,유길,사제,사량,사추,등 아들 손자와 태위 김양감(金良鑑 :광산인),한림학사 오학린(吳學麟 :고창 오씨 시조),시중 문 정(文正 :장연인),김무체(金無滯),태위 최 석(崔奭 :철원인),예부상서 정 문(鄭文 :초계인),판어사대사 이주좌(李周佐 :동경인),벽상공신 개국공 신홍상(申弘尙 :평산인)과 신 성(申晟),신 경(申勁)父子.병부상서 김행경(金行瓊 :영광인),최민용(崔敏庸),한자순(韓子純),태위 오연총(吳延寵 :해주인),우복야 박인량(朴寅亮 :죽산인)과 여진정벌의 명장 문숙공(文肅公) 윤 관(尹瓘 :파평인),충렬공 위계정(魏繼廷 :장흥인),진락공 이자현(李資玄 :인천인),상서 이종현(李從現),홍덕성(洪德成),참지정사 이상정(李象廷),최 상(崔尙 :경주인),최유부(崔有孚 :경주인),학사 김숙창(金淑昌),김 정(金正),김양지(金良贄),평장사 이자연(李子淵 :인천인),상서좌승 이자인(李資仁 :인천인),평장사 이 오(李敖 :인천인),참지정사 최사훈(崔思訓),학사 최 택(崔澤),고 유(高維 :제주인)등이 있고 송(宋)나라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본관을 거창(居昌)으로 삼고 구재(九齋)에 입학하여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한 신 수(愼修)가 있다.신 수는 훗날 벼슬이 사공 좌복야에 이르렀고 자손이 크게 번창하였다.
또한 충이 죽은 후에도 제자의 예로서 따른 사람이 많았다. 당시 문헌공도에 이름을 올린 사람을 대략 살펴보면 문과급제 김황원(金黃元 :광양인),시중 김약온(金若溫 :광주인),어사대사 이 영(李永 :안성인),참지정사 유인저(柳仁著 :풍덕인),평장사 고조기(高兆基 :제주인),정당문학 문강공(文康公) 윤언이(파평인),비서감 최척경(崔陟卿 :완산인),인종 때 급제한 신 숙(申淑 :고령인),문성공 김인존(金仁存 :강릉인),고손(高孫)인 영렬공 최윤의(崔允儀 :6세조),경문공 최홍윤(崔洪胤 :6세조),영렬공 금 의(琴儀 :봉화 금씨 중시조),문강공 김부일(金富佾 :경주인),송나라 출신 임 완(林完),한림학사 정 항(鄭沆 :동래인),문정공 이지저(李之低 :인천인),평장사 이공승(李公升 :청주인),문숙공 최유청(崔惟淸 :철원인),간관(諫官) 정습명(鄭襲明 :영일인),충숙공 문극겸(文克謙 :남평인),재상을 지낸 민영모(閔令謨 :여흥인),유차달(柳車達)의 손자인 참지정사 유공권(柳公權 :유주인),학사 이인로(李仁老 :인천인),현정공 오세재(吳世才 :고창인),문정공 조 충(趙 :횡성인),평장사 최홍사(崔弘嗣 :충주인),정숙공 김인경(金仁鏡 :경주인),청도 김씨 시조인 영헌공 김지대(金之岱),우부승선 이공로(李公老 :단산인),문순공 이규보(李奎報 :황려인),시랑 이종주(李宗胄),평장사 홍 균(洪鈞 :개령인),충의 후손이며 태사인 문청공 최 자(崔滋 :8세조),위위경 하천단(河千旦 :안음인),좌복야 손 변(부평인),중찬 문경공 허 공(許珙 :공암인),첨의참리 장 일(張鎰 :창령인),문량공 설공검(薛公儉 :순창인),대사성 유충기(劉忠基 :충주인),송언기(宋彦琦 :진천인),문정공 김 구(金邱 :부령인),참지정사 이장용(李藏用 :인천인),보문각 학사 백문절(白文節 :남포인),대사성 곽 예(郭預 :청주인),현리(縣吏) 주여경의 아들 주 열(朱悅 :능성인),문정공 유 경(柳璥 :문화인),사림학사 이승휴(李承休 :가리인),재상을 지낸 정가신(鄭可臣 :나주인),문림랑 이 소(덕수인),정 안(鄭晏 :하동인),보문각 대제 이순목(李淳牧 :합천인),국학학정 채 정(蔡靖 :음성인),밀직사사 전 신(全信 :천안인),영산군 장 항(張沆 :영동인),좌사보 이 성(李晟 :담양인),한림학사 조 통(趙通 :옥과인),면성부원군 구 예(具藝 :능성인),평장사 임 규(任奎 :장흥인),계양군 이 위(李瑋 :부평인),첨의평리 정 선(초계인),가락군 허유전(許有全 :김해인),찬성사 김 훤(金暄 :의성인),문성공 안 유(安裕 :순흥인),문희공 우 탁(禹倬 :단양인),영가부원군 권 부(權溥 :안동인),창성군 조광한(曺匡漢 :창령인),상당군 백이정(남포인),문렬공 이조년(李兆年 :경산인),문충공 이제현(李齊賢 :경주인),함양군 박충좌(朴忠佐 :함양인),반남 박씨 중시조 박상충(朴尙衷),문절공 한종유(韓宗愈 :한양인),문효공 이 곡(李穀 :한산인),문정공 윤 택(尹澤 :무송인),진산군 강 시(姜蓍 :진주인),상당군 한 수(韓修 :청주인),문충공 정몽주(鄭夢周 :영일인),문재(文才) 이숭인(李崇仁 :성산인),목은 이 색(李穡 :한산인),성균학관 정습인(鄭習仁 :초계인),우부대언 김득배(金得培 :상주인),예문관 대제학 이인범(李仁範 :덕수인),야은 길 재(吉再 :선산인),강성군 문익점(文益漸 :단성인),우의정 맹사성(孟思誠 :신창인),영의정 황 희(黃喜 :장수인),창녕부원군 성석린(成石璘 :창령인),좌의정 하 륜(河崙 :진주인),길창군 권 근(權近 :안동인),문절공 이 행(李行 :여주인),고려멸망과 함께 치악산에 들어간 원천석(元天錫 :원주인)등 그 수가 수 백인에 달하며 이들 모두가 당시의 이름 난 대학자요 명재상들이었다.

다음같은 詩가 전한다.

絶句七言『滿庭月色無煙燭 入座山光不速賓 更有松絃彈譜外 兄堪珍重未傳人』마당 가득한 달빛은 연기없는 촛불이요.자리에 드는 산 빛은 청하지 않아도 스스로 찾는 손님일세.건너 솔 바람소리는 곡조없는 자연의 음악.나 혼자 즐길 뿐 남에게 전하지는 못하리로다.

示座客『水閣風楹苦見招 簿書叢顆度流年 朱樓紫筍時將過 紅槿丹榴態赤姸 病久却嫌邀客飮 性溶便喜聽鶯眼 良辰健日終難在 急盡花開作醉仙』물위의 전각 서늘한 바람 드는 곳에 초대를 받고서도 문서더미속에 세월만 보냈구나.붉은 앵두 자주 빛 죽순의 철도 넘어가려 하니 무궁화 석류 꽃은 모양도 어여쁘리라.오래 앓고 나니 손님마저 귀찮아져 술 마시는 일도 잊은지 오래고 성품마저도 게을러 새 우는 소리에 잠자기만 즐겼다.이 좋은 철 긴긴 날을 그냥 보내기는 아쉽고 차라리 꽃 지기 전에 일어나 술 취한 신선이 되어볼까.

[고려사]에 전하기를 충(冲)의 집안엔 대대로 명신(名臣)이요 공신(功臣)이 많아 오랜 동안 번성과 영화를 누렸다.자손들 또한 대 문장가 후손답게 오로지 자신의 실력으로 과거에 급제하니 한 집안에 재상(宰相)된 사람만도 수 십인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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